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[[제1차 세계 대전]]의 발발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로 늘 거론되는 것이 [[영국]]과 [[독일 제국]]의 [[건함 경쟁#s-3|건함경쟁]]이다. 독일 제국의 [[빌헬름 2세]]와 해군제독 알프레히트 폰 티르피츠가 추진한 건함정책에 맞서, '''1 > 2+3 정책이라고 해서 해군력 2위, 3위 국가의 전력합계보다 더 강력한 해군력을 상시적으로 유지한다는 영국의 전통적인 해군전략(Two-power standard)'''을 유지하기위한 영국의 대규모 건함, 그리고 이에 자극받은 다른 열강들의 [[건함 경쟁]] 합류는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1차대전 이전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이유였다. 결국 이런 과열된 건함경쟁은 전후 승전국들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다. 건함경쟁의 당사자 중 하나인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여기서 밀려났고, [[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]]으로 인해 다시 부활할 가능성도 제로에 육박했지만, 전쟁에서 이긴 5대 열강국가들은 여전히 막대한 예산을 퍼부으면서 건함 경쟁을 계속하고 있었다. 특히 1차대전으로 신흥국으로 떠오른 [[미국]]과 [[태평양|서태평양]]의 패권국가로 발돋음한 [[일본]]을 중심으로 한 건함경쟁은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만들어냈다. 실제 미국에서는 1920~1921년 사이에 '''건조스케줄상 미국과 일본 제국의 [[전함]] 총량이 균형에 도달하는 [[1923년]]에 전쟁이 터진다'''는 예측을 하는 저서들이 횡행하고 있었을 정도다. 게다가 [[드레드노트]]급 전함이 출현한 이후 전함은 날로 거대해졌고, 건조비용도 폭발적으로 상승하였다. 따라서 전함을 포함한 해군력 확충은 각 국의 재정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으며, 참혹한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각국의 국민들도 이런 군비경쟁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. 이에 따라 각국의 정치가들은 새로운 타개책을 모색하기 시작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